나이라는 숫자


/* 728x90, 작성됨 09. 5. 25 임시 정지 */
나는 모 중공업 회사의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불도저 정신'과 중공업이 상승효과를 일으켜

꽤나 경직된 분위기인 이 곳에서

재작년 이맘 때 즈음, 입사 동기하나가 일을 벌렸다.

연구소 내에 밴드를 만든 것이다.

주로 입사 동기들, 그리고 입사 1년 후배들을 위주의 젊은 사람들로 만들어진

락 밴드.

처음에 만들 때는 사실 걱정도 했던 것이

얼마전 신문에 보니 임직원(임원이 아니라 임직원!) 평균 연령이 51세,

50세 이상 직원이 40%가 넘는다는 초고령화된 회사에서

(그나마 연구소는 좀 낫다)

밴드라는 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그래도 이 친구 놈은 꽤 추진력이 있어서

연구소장님과 운영과 부장님을 설득하더니

며칠 후 연구소 내의 안쓰는 작은 창고를 밀고 연습실을 꾸몄다.

같이 하기로 한 연구원들의 각출과

연구소 동아리 지원비를 받아 드럼과 앰프, 스피커도 마련하고

어느새 그럴듯한 밴드를 하나 만들었다.

신기한 것은 200명도 채 안되는 이 연구소에서

나름 작은 밴드 하나를 만들만큼(그것도 몇 안되는 젊은 사람들만으로!)

재주꾼들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나둘 밴드가 자리를 잡아갈 때

걱정되었던 주변 차부장님들의 반응은 의외로 호의적이었다.

필요한 걸 말씀드리면 이런 저런 지원도 많이 나오고

심지어는

'우리도 나이든 사람들끼리 밴드 하나 만들까? 김 부장 젊을 땐 통기타 좀 쳤다고 하지 않았어?'

라는 말씀들도 하셨다.

회사에서 공연을 하고 나서는 소장님과 각 부서 부서장들의 '금일봉'이 내려지기도 했다.

물론 회식비~:)


그렇게 밴드가 만들어지고 2년이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 밴드는 두 번의 공연을 했고 점심시간이면 하나둘 모여서 연습을 한다.

그 와중에

어느 차장님은 조용히 올라오셔서 구경을 하시다가

밴드 리더를 맡고 있는 친구가 기타 좀 쳐달라고 부탁을 하자

잠깐 빼시다가 기타를 받아들고서는 멋지게 한 곡 연주를 하시고 가신다


연습을 하고 점심을 먹다가 친구가 꺼낸 말이

그나마도 용기가 없으신 어느 부장님은

야근 시간에 남들 몰래 조용히 올라와 드럼을 연주하고 가신단다

'아이참, 옛날 이야기지 무슨..'

이라는 말과 함께 조용히 받아드는 스틱

그리고 멋진 두드림


나도 이제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지만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참 많은 것에 대한 희생을 요구한다.

꿈, 즐거움, 가끔은 나에 대한 정체성..

그런 것들과 멀어지며 다시 일과 생활에 파묻혀 간다.

그게 우리가 말하는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간다고 해서

하고 싶은 것들, 좋아하는 것들이

싫어지거나, 마음에서 멀리 떠나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삶에 지쳐, 일에 지쳐

잠시 내 옆에 놓아두었을 뿐.

언제든 누군가 그 것을 들어 나에게 준다면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고 다시 한 번 연주해보고픈

욕심은 늘 가슴 한켠에 품고 있다.

아마 당신이 '나이가 드셔서' 라고 생각하고 있는

당신의 교수님이나 회사 상사나 부모님들도

가슴 한 켠에 그런 것들을 품고 계실 것이다

다만 제자가 보기에, 밑에 직원들 보기에, 자식들 보기에

나이먹어서 뭐하는 거냐 라는 말이 두려워

또 하루를 흘려보내실지도 모른다.


나이라는 숫자.

가끔은 그 나이를 잊고 살아가는 그런 분들이 참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나이가 들더라도

지금처럼 마이크를 하나 들고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지를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글쎄 싶어서 더욱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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