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 바르셀로나와 스페인 내전


/* 728x90, 작성됨 09. 5. 25 임시 정지 */
흔히 축구에서 더비(Derby)라 함은 지역내 라이벌 전을 말한다.

지역 내의 계층간 갈등 등으로 인해 생겨나는 자연발생적인 두 팀간의 경쟁심리로 인해 더비경기는 치열한 라이벌전으로 항상 진행되기 마련인데

AC 밀란과 인터밀란 간의 밀란 더비

에버튼과 리버풀의 머지사이드 더비

맨체스터 시티와 맨체스터 Utd.의 맨체스터 더비와 같은 것들이 그런 대표적인 예이다.

맨체스터와 리버풀 전들도 전통적인 라이벌 전이지만, 장미전쟁(두 팀 모두 붉은 유니폼이다)이라고 부를 뿐

좀처럼 더비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더비라는 말에 예외가 있으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치열한 더비.

바로 엘 클라시코 더비(El Clasico Derby) 이다.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간의 경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발생하는 의문.

왜, 지역 라이벌도 아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간의 경기가 더비가 되었을까.

그리고, 왜 이렇게 치열한 라이벌전이 되었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바르셀로나는 유니폼 스폰서가 없을까.

(일반적으로 바르셀로나 정도되는 탑클래스 팀의 유니폼 스폰서는 연간 수백억에 달한다.

일례로 삼성의 첼시 유니폼 스폰 비용은 5년간 천억이었다.

현재 바르셀로나의 유니폼에는 Unicef 광고가 붙어있으며 FC 바르셀로나 구단은 이 광고에 대한 대가로

해마다 구단 수익의 일정액을 유니세프에 기부한다. 응?? )

이런 약간은 생소한 모습을 이해하려 하면 꼭 한 번 들를 수 밖에 없는 이야기가 바로 스페인 내전이다.


공황의 혼란 속에서 2차 대전의 조짐이 조금씩 보이던 1931년.

스페인에서는 제2 공화정이 수립되었고 왕정이 폐지된다.

다시 1936년 2월 총선으로 집권한 인민전선(사회당, 좌파 공화파, 공산당 등의 연합)이 본격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하자

지주계층, 로마 카톨릭 교회 등의 기득권 층은 군부를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렇게 1936년 7월 14일부터 1939년 4월 1일까지 3년간에 걸친 내전은 최소 50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남겼으며 내전 후에도 약 40만명 이상이 숙청당했다.

사상의 충돌 혼란 속에  발발해 국제 여단이라는 국적을 초월한 자원자들까지 뛰어든 전쟁.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어니스트 헤밍웨이)', '카탈루냐 찬가(조지 오웰)', '게르니카 (파블로 피카소)'와 같은 예술 작품들이 이 전쟁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그리고 내전의 승자로 등장한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은 1975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36년간의 파시스트 독재를 하였으며

스페인은 그가 사망한 이후 후안 카를로스 현국왕에 의해

1978년 민주주의에 기반한 입헌군주국으로 전환하게 된다.

(극적이었던만큼 할 말도 많은스페인 내전이지만, 지금 그 이야기는 잠시 미루자)


하여간 그렇게 36년간 파시즘에 기반한 억압적 통치를 펼쳤던 독재자 프랑코 장군은

열렬한 스페인 통합주의자였으며 레알 마드리드의 광팬이었다.

분리독립을 요구하던 카탈루냐와 바스크를 철저히 억압했으며,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치권마저도 박탈했고

카탈루냐어와 카탈루냐 국기의 사용도 금지했다.

분리독립 요구 뿐만 아니라 좌파 정권의 정치 기반이기도 했으며

내전당시 가장 극렬한 저항을 펼쳤던 곳 역시 바르셀로나였다.

(당시 바르셀로나의 예술인들도 극렬한 저항을 표출했으며 결국 망명길에 올라야 했는데

카잘스, 피카소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억압의 역사 속에서 카탈루냐의 사람들이 그들의 분노를 표출할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은 축구장이지만

그마저도 완전하지는 못했다.

FC 바르셀로나의 2대 회장이었으며 1936년 8월 당시 좌파 정권의 핵심 중 한 명이었던 호셉 슈뇰이 프랑코 군대에 의해 사살되었으며

축구 클럽은 외국어(스페인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규정에 의해

클럽의 명칭이 FC(Futbol Club) Barcelona에서 CF(Club de Futbol) Barcelona로 변경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또한 1943년 코파 델 레이 (잉글랜드의 FA 컵과 동일한 대회) 준결승전 1차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3:1로 승리한 후에

정부기관의 협박에 의해 2차전을 1:11로 대패하는 수모도 겪어야 했다.

1953년에는 당시의 전설적인 스타 디 스테파노를 구두계약이 완료된 상태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빼앗기기도 했다.

그렇게 36년을 끙끙 앓기만 해야 했던 바르셀로나에 빛이 들었다.

73-74시즌, 불세출의 스타 요한 크루이프가 들어와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지금은 드록신이 계시지만 하지만 당시는 요한신이 계셨다.

요한신께서 가라사데 빛이 들라하시니 그 시즌 팀은 리그 우승을 하고

이듬해인 75년에는 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했다. (응??)

당시 클럽 관계자들은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억압의 역사는 끝났다'

그렇게 정치의 시대는 조금씩 저물게 되었다.


흔히 축구는 전쟁의 대신이라는 말이 있다.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라는 말을 하지만 스포츠는 어쩔 수 없이 정치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스포츠가 축구이다.

매해 전세계 모든 축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최고의 라이벌전인 엘 클라시코 더비 역시

그 뒤에는 독립투쟁과 억압, 독재와 투쟁이라는 역사가 얽혀

한치의 양보없는 싸움이 되고 있다.

올해의 엘 클라시코 더비는 2-0, 6-2로 FC 바르셀로나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내년에는 또 누가 어떻게 이기게 될까?

또 그렇게 전 세계의 모든 축구팬들은 기다릴 것이다.

이것이 축구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최고의 명승부를 해마다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가 바로

엘 클라시코 이기에.